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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편에서는 회사가 계약의 집합체이고, 잘 정리된 계약이 AI 시대의 필수 자산임을 설명드렸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누구나 정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대부분의 회사에서 계약이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은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중요한 물건은 제 자리에 두어야 찾기가 쉬워집니다.
대부분 중요하거나 자주 쓰는 물건은 정해진 자리에 두는 습관이 있으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권, 인감도장, 열쇠, 리모컨, 충전기 같은 것들입니다. 물건은 자리를 정해서 정리해 두면 그 물건이 꼭 필요하거나 급한 순간에 큰 도움이 됩니다. 즉, 중요하거나 자주 쓰는 물건일수록 정해진 자리에 정리해 두어야 합니다.
정리가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의지만으로는 실행하기가 어렵습니다.
정리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기억은 시험 기간의 책상 정리입니다. 시험 기간에는 평소에는 안 하던 책상 정리가 하고 싶어져서 열심히 책상을 치우곤 했습니다. 교과서와 문제집을 과목별로 정렬하고, 필기구를 나란히 늘어놓았습니다. 책상을 정리하고 나면 집중이 잘 되는 것 같아서 만족스러웠습니다. 다만, 시험 이후에는 이런 책상 정리가 지속되지 못했고, 곧 다시 어질러졌습니다.
두 번째 기억은 군대 훈련소의 관물대입니다. 처음 입소했을 때부터 수건은 몇 번 접어 어느 칸에 두는지, 전투복은 어떤 순서로 거는지, 침구는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조교가 매일 관물대 점검을 했고, 제대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으면 분대 전체가 얼차려를 받았기 때문에 이런 방식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익숙해지는 과정은 불편했지만, 막상 익숙해지고 나니 그 만족도는 매우 컸습니다. 불이 꺼진 뒤에도 손을 뻗으면 물건이 잡혔고, 옆 사람의 관물대를 열어도 같은 자리에 같은 물건이 있었습니다. 관물대가 잘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밤중 5분 내에 집합하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이런 관물대 정리는 제대할 때까지 잘 지켜졌습니다.
세 번째 기억은 가계부 정리입니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시절에는 매월 카드별로 사용내역을 보면서 엑셀 파일에 옮겨 적고, 각 지출 항목을 구분하여 정리하였습니다. 내역을 카드사에서 보내주긴 하지만 옮겨 적고 분류하는 것 자체도 귀찮은 일이라서 중간중간 공백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즉, 정리는 하고 싶었는데 실행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카드로 결제하는 순간 지출 항목이 분류되고 월별로 합산해 주는 앱들이 있어서, 편하게 지출 항목과 금액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 가지 기억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정리가 지속된 경우에는 제 의지 외에도 시스템의 도움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즉, 정해진 규격과 기준, 점검이 있어야 공백 없이 정리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회사의 계약관리도 같은 선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회사에서 계약서를 정리하는 일은 담당자의 의지에 맡겨져 있는데,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관리의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회사의 계약관리가 부실화되는 과정도 저의 경험과 비슷했습니다.
저희가 만나 본 회사들은 비슷한 방식으로 계약서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현업과 법무 담당자, 거래 상대방이 서로 메신저나 메일로 계약서를 주고받으면서 각자 수정을 하거나 코멘트를 달아 두고, 계약이 체결되고 나면 공유폴더에 넣어 두는 방식입니다. 저희는 그 과정에서 회사들의 공통된 문제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파일들이 체계 없이 분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현업 담당자가 만든 "공급계약서_초안.docx"는 법무팀의 검토를 거쳐 "공급계약서_법무검토.docx"가 되고, 상대방과 주고받으며 "공급계약서_v2.docx", "공급계약서_v3.docx"를 거쳐 "공급계약서_최종.docx"가 됩니다. 서명 직전에 상대방이 한 번 더 수정을 하게 되면 "공급계약서_최종_수정.docx"가 생성되고, 그 다음에 "공급계약서_final.docx"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서명을 마친 날인본은 "스캔(체결본)_0315.pdf"라는 이름으로 총무팀 담당자의 메일함이나 공유폴더에 들어옵니다. 하나의 계약인데도 여덟 개의 파일이 생기고, 이 파일들은 현업 담당자의 PC, 법무 담당자의 메일함, 상대방과 주고받은 외부 메일함, 총무팀의 공유폴더에 산재해 있습니다. 회사의 중요한 자산이 정리되지 않은 채 널려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계약서를 정리하는 장소와 방식에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체결된 계약서는 법무팀이나 총무팀의 공유폴더에 저장되어야 하고, 위의 여덟 개 파일과 수정자, 변경 이력도 한 곳에서 확인되어야 하지만, 이런 체계를 갖춘 회사는 많지 않았습니다. 즉, 대부분의 회사에서는 체결 시점과 담당자에 따라 체결본과 수정 버전을 저장하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체결본을 찾거나 수정 이력, 경위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고, 시간도 많이 걸린 것입니다. 1개월 이내에 체결한 계약은 담당자의 PC나 받은 편지함에서 몇 분 안에 찾을 수 있었지만, 1~2년이 지나 담당자가 부서를 옮기거나 메일이 아카이빙되면, 후임자가 전임자에게 연락해야 했고 계약서를 찾는 데 몇 시간이 걸렸습니다. 더 나아가 3년이 지나 담당자가 퇴사하고 메일 계정이 삭제되면, 상대방 회사나 자문 변호사에게 사본을 요청해야 했고 하루 이상이 걸렸습니다.
이 두 가지 문제를 통해 확인한 것은, 계약서 정리는 체결이 끝난 순간부터 조금씩 느슨해지다가 담당자가 자리를 옮기는 순간 단절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대부분의 인지적 기억처럼 회사의 계약관리도 서서히 휘발되었고, 담당자들이 각자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제대로 정리는 되지 않은 것입니다.
체계적인 계약관리를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관물대와 가계부 앱이 책상 정리와 달랐던 점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정해진 자리와 규격이 있었습니다. 수건이 어느 칸에 가는지, 지출이 어느 항목에 들어가는지가 정해져 있어서 매번 판단할 필요가 없었고, 누가 하더라도 결과가 같았습니다. 반면 회사에서는 "계약서는 공유폴더에 올려 주세요" 정도의 안내만 있을 뿐, 어떤 이름으로, 어떤 정보를 붙여서, 어느 단계에 올릴지는 담당자의 재량에 맡겨져 있습니다.
(2) 확인하거나 점검해주는 사람 또는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조교는 매일 점호 때 관물대를 점검했고, 가계부 앱은 제가 잊고 있어도 결제 내역을 대신 받아 적었습니다. 회사의 계약관리에는 이 역할이 비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업은 계약서 초안을, 법무팀은 검토를, 총무팀은 보관을, 재무팀은 지급을 맡지만, 체결 이후의 이행관리와 만기, 갱신 관리는 업무분장규정에 적혀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성격이 다른 여러 업무가 계약관리라는 한 단어에 섞여 있어 경계를 나누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3) 점검의 주기가 있었습니다. 관물대는 매일 아침, 가계부 앱은 결제할 때마다였습니다. 회사의 계약서는 분쟁, 실사, 감사처럼 필요가 생기기 전에는 다시 열어 보지 않습니다. 즉, 점검의 주기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회사의 계약관리가 유지되지 않는 이유가 보다 명확해집니다. 열심히 하려는 담당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정리가 시스템으로 남지 못하고 사람에게 귀속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검토와 협상에는 마감이 있지만 정리에는 마감이 없고, 사람은 마감이 있는 일부터 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험이 끝나면 책상이 어질러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여기까지 읽어 보셨다면 이런 의문이 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계약관리 규정을 만들고, 담당자를 지정하고, 분기마다 점검하면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저희가 확인한 현실은 기대와 차이가 있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그 규정들이 왜 장기간 지속될 수 없는지, 정리를 사람의 일에서 시스템의 일로 옮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