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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시리즈 1편] 좋은 회사는 정리를 잘합니다.
시리즈를 시작하며: AI가 업무의 풍경을 빠르게 바꾸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변화의 출발점은 의외로 "정리"라는 오래된 단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리즈에서는 왜 법무팀 등 회사의 계약담당부서가 계약을 잘 정리해야 하는지, 계약서가 어떻게 자산이 되는지, 잘하려는 마음이나 의지만으로는 왜 일관된 만족을 얻을 수 없는지, 꾸준하게 정리를 해 온 회사에게 AI가 어떤 무기가 되어 줄 수 있는지를 차례로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오래된 계약서 한 장에 수천억 원의 가치가 인정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변호사로 일하던 시절, 저는 분쟁의 승패가 10년 전 작성한 계약서 한 장에서 갈리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분쟁에서는 계약의 해석이 문제가 됩니다. 즉, 쟁점이 된 조항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따라 수천억 원의 돈이 오고 가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쟁점이 된 조항과 관련한 히스토리가 중요해집니다. 과거에 체결했던 계약서 초안, 협상 과정에서 상대방과 주고받았던 의견, 그에 따라 초안에서 수정된 내역과 경위가 모두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조항이 어떤 당사자의 요청으로 수정된 것인지 여부도 결정적인 증거가 됩니다.
이렇게 계약과 관련된 자료와 경위를 증거로 제출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회사마다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어떤 회사는 30분 만에 계약서의 각 버전과 변경이력, 각 버전의 비교본, 수정된 경위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보내왔고, 어떤 회사는 최종 날인본을 찾는 데에만 하루가 넘게 걸렸습니다.
"3년 전에 체결한 계약서를, 5분 안에 찾을 수 있을까요?", "5년 전 체결한 계약서의 지급조건이 왜 초안과 달라졌는지, 어떤 당사자의 요청에 따라 달라지게 된 것인지, 1차-2차-3차 수정의 내용과 이유는 무엇인지 확인이 가능할까요?"
이 질문에 바로 가능하다고 답할 수 있는 회사는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담당자가 퇴사한 계약, 현업이 직접 체결하고 공유하지 않은 계약, 누군가의 메일함 어딘가에 잠들어 있는 계약 등 분명히 존재하는데 아무도 위치를 모르는 계약서가 어느 회사에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약서는 대개 분쟁, 실사, 감사처럼 중요한 순간에 갑작스럽게 필요해집니다.
계약은 회사의 중요한 자산입니다.
회사는 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직원을 채용하는 일(근로계약), 사무실을 구하는 일(임대차계약), 제품을 만들어 파는 일(공급계약과 매매계약), 사업 자금을 마련하는 일(투자계약과 금융계약)들이 모두 계약의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회사의 탄생 자체가 발기인들의 합의에서 출발하고, 성장의 분기점마다 투자계약이 놓이며, 다른 회사와 결합하는 마지막 순간에는 M&A 계약이 놓입니다. 법경제학에서 회사를 계약의 결합체(nexus of contracts)라고 설명하는 것도 이러한 실질을 포착한 표현일 것입니다. 즉, 회사는 계약의 집합체이고 계약의 합이 회사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회사의 계약 프로세스는 대체로 비슷할 것입니다. 현업이 기안을 하고, 내부결재를 받고, 법무검토를 요청하고, 법무에서 승인을 받으면, 서명을 하고, 체결본을 보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법무의 일은 검토와 협상에서 끝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조항을 다듬고, 리스크를 짚어내고, 상대방과 문구를 주고받는 일. 변호사의 전문성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고, 실제로 가장 조명받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간축을 길게 놓고 보면 구도가 달라집니다. 검토나 협상은 대부분 며칠 또는 몇 주 이내로 종결됩니다. 반면 한번 체결된 계약은 그 뒤로 3년, 5년, 길게는 10년을 회사와 함께 살아 있습니다. 갱신 기한이 돌아오고, 지급조건을 챙기고, 손해배상 한도를 확인할 일이 생기고, 인수합병되면서 법률 실사를 받게 되고, 지위 승계 문제가 이슈되기도 합니다. 체결을 마친 계약서는 임무를 다한 서류가 아니라, 회사의 권리와 의무가 기록된 채 회사와 함께 항해하는 자산인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조직이 검토까지만 법무의 일로 여기고, 그 이후의 관리는 소극적인 보관에 그친다는 점입니다. 자산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회사가 그 자산을 운용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좋은 법무팀과 그렇지 못한 법무팀의 격차는 검토하는 순간이 아니라, 검토가 끝난 다음부터 벌어집니다.
계약을 단순히 보관하는 데에 그치지 말고,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계약서를 폴더에 잘 넣어두었다고 해서 정리가 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스캔본을 공유 폴더나 드라이브에 올리고 연도별 폴더로 나누어 두는 것은 단순한 보관에 불과하고, 자산을 관리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계약의 측면에서 정리란, 관련 질문이 들어왔을 때 바로 답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일입니다. 예컨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즉시 답변을 할 수 있어야 계약을 제대로 관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갱신 시점이 3개월 안에 도래하는 계약이 몇 건인가, (2) 손해배상 한도를 계약금액 전액으로 합의해 준 계약이 얼마나 되는가, (3) 이 계약에서 이행하여야 할 의무는 무엇이고, 그 기한은 언제까지인가, (4) 이 계약의 마일스톤은 어디까지 달성되었는가.
보관은 파일이 저장된 폴더를 알려주는 것이지만, 정리는 이런 질문에 답하게 해 줍니다. 계약서라는 문서에서 당사자, 기간, 금액, 핵심 조항이라는 구조화된 정보를 꺼내어 한눈에 조망할 수 있게 만드는 것. 비유하자면, 잘 관리된 계약은 해도와 같습니다. 어느곳에 장애물이 있는지, 언제 쉬어야 하는지, 어떤 길로 가야 목표에 가장 빠르게 도착할 수 있는지를 상세하게 안내해 주는 이정표인 것입니다.
잘 관리된 계약은 법무팀과 담당자의 위상도 높여 줍니다. 경영진의 질문에 "확인해 보겠습니다, 회의 후 답변드리겠습니다"라고 답하는 사람과 그 자리에서 바로 숫자로 답변을 내놓는 사람은 회사에서 전혀 다른 평가를 받습니다. 특히, 실사나 소송, 감사처럼 외부의 제3자가 회사 내부를 들여다 볼 때에는 이것이 협상력의 차이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지금, 정리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AX를 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정리가 중요하다는 것은 대부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저희가 지금 새삼스럽게 정리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AX(AI Transformation) 때문입니다.
지난 한두 해 사이 업무에 AI를 들이려는 시도가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계약서 초안 작성, 검토 보조, 조항 비교까지 도구는 이미 나와 있고 성능도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AI 도입은 어떤 도구를 고르느냐의 문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도입을 진지하게 검토해 본 회사라면 공통적으로 마주치는 벽이 있습니다. AI에게 우리 회사 계약에 관해 물으려면, 먼저 우리 회사 계약이 AI가 읽을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계약서가 개인 메일함과 캐비닛과 부서별 공유폴더, 드라이브에 흩어져 있는 회사에서는 AI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즉, 계약이 데이터화, 자산화되지 않은 회사에서는 AI를 도입하거나 제대로 활용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아무리 유능한 항해사를 태워도 해도가 없는 배가 먼 바다로 나가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같은 도구를 쓰더라도 계약이 한곳에 모여 구조화된 회사와 그렇지 않은 회사의 결과물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벌어질 것입니다. AI 시대의 격차는 어떤 도구를 쓰느냐보다, 그 도구에게 건넬 수 있는 정리된 자산과 데이터가 있느냐에서 갈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정리가 AI 시대의 전제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리즈가 향하는 목적지도 바로 그 지점입니다. 다만 목적지로 가기 전에 짚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정리가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데, 왜 대부분의 회사에서 이런 정리가 잘 이행되고 있지 않은지, 왜 일관된 만족을 얻을 수 없는지. 저는 그것이 담당자의 의지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이야기를 다음 편에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