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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지만 화려한 기술 시연과 장밋빛 전망의 이면에는 고민도 깊다. 수많은 AI 솔루션이 ‘혁신’을 외치지만 정작 기업의 실무 현장에서는 “그래서 이걸로 뭘 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기술을 위한 기술, 보여주기식 AI가 아닌 기업의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비용을 절감하며 생산성을 높이는 ‘쓸모 있는 AI’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 질문에 답을 제시하려 노력하는 스타트업이 있다. 2023년 4월 설립된 ‘래티스’다. 기업의 계약 관리 전 과정을 AI로 혁신하는 CLM(계약 생애주기 관리) 솔루션 ‘프릭스(prix)’를 통해 B2B SaaS 시장에서 주목받는 플레이어 중 하나로 급부상하고 있다. 창업 2년 만에 누적 투자 21억원, 관리 계약서 10만건 돌파라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프릭스는 계약 작성·검토 단계에서 AI가 계약서를 요약하고 핵심 조항을 추출해 계약서 관리에 필요한 시간을 줄이고 검토 속도를 높인다. 체결 과정에서는 본인인증, 전자서명, 감사추적인증서를 지원해 법적 신뢰성을 강화하고 이후 이행·갱신 단계에서는 권한 체계와 감사 이력 관리, 데이터 기반 보고와 대시보드로 법무팀의 업무 효율을 높이고 있다. 최근에는 계약서 요약 및 조항 자동 추출 외에도, 자연어 검색 기능, 리스크 검토 기능 등 AI 기반 기능의 고도화를 진행하며 법무팀의 리스크 관리 체계를 강화하고 있다.
래티스의 강상원 대표는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제53회 사법시험에 차석으로 합격한 후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M&A 및 금융 전문 변호사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법무법인 ‘최선’을 공동 창업해 운영했고 사모펀드(PE)인 캑터스PE에서 수석심사역을 거치며 투자와 경영 경험을 두루 쌓았다. 그리고 2023년 4월 B2B(기업 간 거래)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 스타트업 ‘래티스’를 창업했다.
강 대표를 15일 서울 서초동 오피스에서 만났다.

강상원 대표. 사진=래티스
"기술이 아닌 ‘고통’에서 출발하라"
성공적인 AI 스타트업의 첫 번째 조건은 역설적으로 AI를 잊는 것이다. 기술의 잠재력에 매몰되어 해결할 문제를 찾는 ‘기술 우선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 시장의 가장 아프고 비용이 많이 드는 고통(Pain Point)에서 출발해야 한다.
래티스의 창업 스토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강상원 대표는 AI 전문가가 아닌, 문제의 당사자였다. 김앤장 변호사를 거쳐 직접 로펌 ‘최선’을 공동 창업해 운영하며 매일같이 계약 관리의 비효율과 씨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객마다 대금 청구 주기가 다르고 계약 내용에 따라 청구 방식도 달라 관리에 애를 많이 먹었다”며 “변호사들은 대부분 계약을 체결해야 업무를 시작하는데, 그 계약과 연결된 후속 업무들이 너무 복잡했다”고 했다. 자문 계약, 소송 수임 계약 등 수많은 계약서들은 체결되는 순간 서류함에 갇혔고 이후 대금 청구, 세금계산서 발행, 계약 갱신 등의 중요한 이행 관리는 담당자의 기억과 수작업에 의존했다.
해결책을 찾아봤지만 마땅한 툴이 없었다. 결국 직접 엑셀을 열어 얼기설기 관리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솔루션 프릭스의 시작, 즉 MVP(최소 기능 제품)의 원형이었다. 강 대표 입장에서는 AI라는 거대한 망치를 들기 전 못이 어디에 얼마나 깊이 박혀 있는지 손으로 먼저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후 눈이 트이기 시작했다. 계약이라는 콘텐츠를 디지털 전환, AI 전환으로 만들어가면 어떨까? 틈이 보였다. B2B 영역의 기업 분쟁 대부분은 계약 ‘체결’이 아닌, ‘체결 이후’의 이행 관리 소홀에서 발생하며 사소한 실수가 곧 막대한 금전적 손실과 법적 분쟁으로 이어진다는 점에 착안했다.
강 대표는 “기업 미팅에서 ‘지금 유효한 계약이 총 몇 개인지 아시나요?’라고 물으면 대답할 수 있는 회사는 사실상 없다”며 "이는 기업들이 핵심 자산이자 리스크 원천인 계약 현황을 제대로 파악조차 못 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이어 "프릭스는 바로 이 ‘정보의 안개’를 걷어내는 것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법률가로서의 깊은 ‘도메인 지식’이 있었기에 기술의 화려함이 아닌, 문제의 본질에 집중할 수 있었던 셈이다. 프릭스의 강점이기도 하다.

사진=프릭스 갈무리
AI와 인간과의 협업을 설계하라
AI 기술을 도입하려는 기업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신뢰성’이다. 특히 법적 효력을 지닌 계약서처럼 단 하나의 오류도 치명적일 수 있는 영역에서는 AI의 불완전함이 도입의 가장 큰 장벽이 된다.
성공적인 AI 스타트업은 이 한계를 외면하거나 혹은 과장해서 포장하지 않는다. AI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인간-AI 협업 모델’을 제품의 핵심으로 설계한다.
래티스도 이 지점에서 영리한 접근법을 취한다. 투트랙이다. 강 대표는 "우리는 AI가 처리하는 업무를 ‘오차를 감수할 수 있는 영역’과 ‘오차를 결코 감수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나눈다"면서 “전자에 속하는 계약서의 전체 내용을 요약해주는 기능은 사람이 검토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에 오차를 어느 정도 감수할 수 있고 핵심 내용 파악을 돕는 보조 도구로서의 역할이기에 약간의 어색함이나 누락이 있더라도 업무 효율을 높이는 가치는 충분하다"고 말했다.
반면 후자에 속하는 계약의 핵심 데이터를 추출, DB에 저장하는 작업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계약 기간, 당사자, 금액, 위약벌 조항, 자동 갱신 조건 등은 기업의 재무 및 법률 리스크와 직결되는 정보기 때문이다. 만약 AI가 정보를 잘못 인식한다면 파국이 닥쳐온다.
래티스는 이 두 영역을 분리하고 후자의 영역에 ‘Human-in-the-Loop(인간 참여형 루프)’를 의무적인 프로세스로 설계한다. 강 대표는 "프릭스에서 AI가 계약서의 핵심 정보를 추출하면 그 결과는 시스템에 자동으로 저장되지 않으며 그 대신 사용자 인터페이스(UI) 화면에 ‘AI 추천값’으로 먼저 표시된다"면서 "사용자는 이 추천값을 눈으로 확인하고 필요시 수정하며 최종적으로 ‘확인’ 버튼을 눌러야만 해당 정보가 공식적인 데이터로 DB에 입력된다"고 말했다.
강 대표는 나아가 “AI가 추천한 내용을 사람이 반드시 더블 체크하고 승인해야 DB에 들어가도록 했다”면서 AI를 ‘결정자’가 아닌 ‘똑똑한 조수’의 위치에 뒀다고 말했다. AI의 속도와 자동화 이점을 누리면서도 최종적인 정확성과 책임은 인간이 확보하는 전략이다.
비용과 성능을 최적화하는 운영의 묘도 보여준다. 강 대표는 "모든 기능에 최고 사양의 LLM(거대언어모델)을 사용하는 것은 스타트업에게 큰 부담"이라며 “복잡한 조항을 분석하고 추출하는 어려운 작업에는 클로드 같은 상위 모델을 사용하고 단순 요약이나 근거 조항 매칭 같은 작업에는 그보다 낮은 사양의 모델을 써서 기능별로 최적화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AI 기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비즈니스 목적에 맞게 철저히 통제하고 관리하는 운영 능력이 필요한 순간이다.

강상원 대표. 사진=래티스
데이터 연동 기술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해자를 파라
“기존 LLM을 활용하는 서비스는 진입 장벽이 너무 낮은 것 아닌가?” 많은 AI 응용 서비스 스타트업이 받는 질문이다. 래티스 역시 마찬가지다. 원천기술이 아닌, 데이터를 AI로 가공해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하는 '재창조'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재창조는 제2의, 제3의 재창조를 빠르게 끌어당기는 법이다.
강상원 대표는 믿는 구석이 있다. 범용 AI 모델 자체가 아니라 제각각인 ‘비정형 데이터’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가공하여 구조화된 데이터베이스와 연동하는 독보적인 기술력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 대표는 “단순 외주 개발 SI였다면 우리가 갖는 강점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라며 "래티스의 핵심 역량은 기업들이 PC 폴더 속에 잠재워 둔 수많은 비정형 데이터를 고객이 원하는 방식으로 ‘데이터화’하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한 기업이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선박 건조 관련 문서를 다룬다고 가정해보자. 이 문서들에는 수만 개의 부품 사양, 납품 일정, 검수 조건 등이 복잡한 표와 문장으로 얽혀있다. 그리고 래티스의 기술은 이 '공포의 카오스'에서 단순히 텍스트를 추출하는 것을 넘어 고객과 합의된 규칙에 따라 ‘납품 기일’이라는 정보를 정확히 찾아내고, 그것을 계약 DB의 납기일 필드에 오차 없이 집어넣는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그 과정은 단방향이 아니다. 그는 “문서에서 DB로 뽑는 것도 어렵지만, 규칙에 따라 DB에 있는 내용을 문서에 다시 집어넣는 것은 훨씬 난이도가 높은 일”이라고 설명했다. DB에서 관리되던 수백 개 부품의 변경된 납기일을 자동으로 반영하여 새로운 계약 부속 서류를 생성하는 식이다. 이것이 바로 래티스가 가진 차별화된 기술력이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강점은 아니다. 10만 건이 넘는 실제 계약서를 처리하며 쌓아온 경험이 그 자산이다. 수많은 오류와 시행착오를 겪으며, 예측 불가능한 형태의 문서들을 다루는 노하우를 내재화했다는 설명이다. 강 대표는 "폴라리스 오피스와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통해 문서 처리 기술을 더욱 고도화하는 등,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프릭스 소개. 사진=갈무리
기술 조직을 ‘고객 문제 해결’ 조직으로 재정의하라
아무리 훌륭한 AI 스타트업이라도 고객이 찾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그 간극을 메우는 것은 결국 ‘사람’과 ‘조직 문화’다. 그리고 래티스는 이 지점에서 독특한 조직 운영 철학을 통해 기술 개발이 곧 고객 문제 해결로 직결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강 대표는 “산업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만든 다음에 안 쓰는 프로그램이 되어 버린다”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 전통적인 개발팀과 기획팀(PM)의 경계를 허물었다고 말했다. 회사의 모든 개발자가 PM의 시각을 갖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주어진 스펙에 따라 코딩하는 것을 넘어 이 기능이 고객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인지, 현업 담당자가 어떤 불편함을 겪고 있는지 직접 소통하고 이해해야 한다. 이들은 코드 뒤에 숨어있지 않다. 고객의 목소리가 가장 잘 들리는 최전선에서 기술이라는 도구로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솔루션 아키텍트’ 집단에 가깝다는 설명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PM도 개발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춰야 한다. 아이디어를 내는 것을 넘어 기술적인 구현 가능성과 복잡도를 이해하고 개발자와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어야 현실적인 제품 로드맵을 그릴 수 있다. 그는 “개발자들이 빠른 개발을 하려면 서비스를 완전히 이해해야 하고, PM들이 원활한 소통을 하려면 개발을 어느 정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강상원 대표. 사진=래티스
‘비즈니스 인프라’ 조준하라
래티스는 CLM이라는 시장을 파고들면서도, 동시에 기업 운영 전반을 아우르는 수평적 ‘비즈니스 인프라’로의 도약도 꿈꾼다.
강 대표는 미국의 데이터 분석 기업 ‘팔란티어’를 비전의 나침반으로 삼는다. 그는 “팔란티어가 고객이 가진 산재된 데이터를 연결하고 대시보드로 구현해 올바른 의사 판단을 돕는 것처럼 우리도 그 방향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잠자고 있던 계약서를 데이터화하고(연결), 계약 현황 대시보드를 제공하며(구현), 전자서명이나 인보이스 발행 같은 ‘실행’까지 연결한다.
그 비전은 계약서를 넘어 기업의 모든 비정형 데이터로 확장되고 있다. 프릭스를 개발하며 축적한 비정형 데이터 처리 기술을 활용해 계약서뿐만 아니라 기업 내부에 쌓여있는 온갖 종류의 문서(PPT, 워드, 보고서 등)를 DB와 연동해 관리하는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한다. 이를 바탕으로 ‘데이터 인프라 기업’으로 진화하겠다는 선언이다.
이러한 비전은 ‘격자(Lattice)’라는 사명에도 담겨있다. 강 대표의 롤모델인 찰리 멍거가 강조한 ‘격자형 사고(Latticework of Mental Models)’에서 영감을 받았다. 다양한 학문의 핵심 모델들을 격자처럼 엮어 복잡한 세상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듯, 래티스 역시 기업 내부에 흩어진 다양한 데이터를 연결해 비즈니스의 전체 그림을 볼 수 있게 하겠다는 철학이 담겨있다.

사진=래티스
"지금이 제일 좋다"
물론 갈 길은 멀다. 방향성은 명확하지만 아직 래티스는 증명해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강 대표도 “사업이 10단계라면 아직 1단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다만 이루고 싶은 것들은 많다. 먼저 직원의 성장이다. 강 대표는 "래티스의 공식 사명은 고객의 문제를 IT로 해결하는 최고의 솔루션 프로바이더며, 외부로는 고객에게 최고의 솔루션을 제공하고 내부로는 모든 팀원을 각 분야의 전문가로 만드는 것"이라며 “재능 있고 강한 목적의식을 가진 팀원들이 자율적으로 일하며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최고의 전문가로 성장한 직원이 이직할 수도 있지 않냐는 짖궂은 질문에 그는 “그러면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웃기도 했다. 단기적인 인력 유출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개개인의 성장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 결국 회사 전체를 성장시키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믿음이 엿보였다. 물론 래티스를 최고의 기업으로 키울 수 있다는 자부심도 함께다.
그는 "지금이 제일 좋다"며 "훌륭한 고객사 담당자들을 만나며 배우는 즐거움, 그리고 열정 넘치는 팀원들과 함께하며 감사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물론 창업은 괴로운 일이다. 심지어 창업을 ‘매우 비합리적인 행위’라고 정의했다. 성공 가능성이 낮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도 줄어드는 등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충동이 일어날 때"가 있다. 아이템보다 중요한 것은 ‘왜 하는가’에 대한 스스로의 답과, 함께할 ‘좋은 팀’이라 지론이다.
그 길의 끝에 래티스 프릭스가 있다. 강 대표는 "힘든 일의 연속이며 아직은 부족하지만, 계약이라는 비즈니스의 가장 근본적인 영역에서 시작해 데이터로 기업의 미래를 그리겠다"며 "반드시 AI 기반 CLM 시장에서 한국형 팔란티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 말했다.
ER 이코노믹리뷰 최진홍 기자

